[이 소리] 낙소스 8.550827 — 알레그리 '미제레레'와 합창 걸작선, 클래식 입문의 영원한 이정표!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5-04 07:57:35

낙소스의 1993년도 합창 편집 음반 '알레그리: 미제레레와 그 외 합창 걸작선'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1993년에 발매된 음반이 지금까지, 30년 넘게 팔리고 있다면 분명 '스테디셀러'일 수밖에 없다.

바로크부터 고전주의까지, 서양 합창 음악의 정수를 한 장에 담아낸 음반, 낙소스(NAXOS) 레이블의 카탈로그 번호 8.550827, '알레그리: 미제레레와 그 외 합창 걸작선'이 그것이다. 총 수록 시간 63분 28초, 13개 트랙에 걸쳐 팔레스트리나·알레그리·바흐·헨델·모차르트 등 서양 음악사를 수놓은 거장들의 합창 명곡이 차례로 펼쳐진다.

서양 합창 음악의 지형도

이 음반은 단순한 '모음집'이 아니다. 16세기 르네상스 폴리포니부터 18세기 고전주의 합창에 이르는 방대한 시간적 스펙트럼을 단 한 장의 디스크로 압축했다는 점에서 기획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예배당의 엄숙한 미사곡, 극적인 오라토리오, 경건한 모테트 등 다양한 합창 장르를 균형 있게 배치해 서양 합창 음악의 지형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했다.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려는 청중에게는 더없이 친절한 안내서이며, 기존 애호가에게는 각 곡의 핵심 발췌를 통해 명연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합창 음악이라는 단일 테마 아래 시대와 양식을 넘나드는 이 구성은, 낙소스 편집부의 뛰어난 큐레이션 안목을 증명한다. 낙소스의 초창기부터 1993년까지 발매된 성악곡 중 가장 인기있는 곡이면서 빼어난 녹음만 발췌한 음반이다. 비록 내지의 구성이 빈약한 것이 아쉽지만, 1시간 동안 천상으로 안내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최고의 음반이다. 

레퍼토리에 최적화된 해석

음반에는 여러 연주단체와 지휘자가 참여해 각 레퍼토리에 최적화된 해석을 들려준다.

옥스퍼드 카메라타와 제러미 서멀리(Jeremy Summerly)는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와 팔레스트리나의 '성 목요일을 위한 첫 번째 레슨'을 담당했다. 서멀리는 영국 고음악 해석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청명하고 균형 잡힌 앙상블 사운드를 구현해 르네상스 폴리포니의 영적 깊이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헨델 '메시아' 발췌는 스콜라스 바로크 앙상블(The Scholars Baroque Ensemble)이 맡았다. 이 단체는 지휘자 없이 자율적으로 호흡을 맞추는 방식으로 바로크 합창의 활기와 정교함을 동시에 살려낸다.

바흐의 칸타타 BWV 80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그리고 모차르트 작품 일부에는 헝가리 라디오 합창단과 파일로니 챔버 오케스트라, 지휘자 마티아스 안탈(Mátyás Antál)이 참여했다. 중유럽의 탄탄한 합창 전통을 바탕으로 한 견고하고 중후한 사운드가 특징이다.

모차르트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슬로바크 필하모닉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지휘자 즈데넥 코슬러(Zdeněk Košler)의 연주로 수록됐다. 코슬러는 과잉된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곡이 지닌 비장미를 품위 있게 표현해낸다. 모차르트의 '라우다테 도미눔'에서는 메조소프라노 안나 디 마우로(Anna di Mauro)의 서정적이고 깊이 있는 독창이 큰 인상을 남긴다.

결정적인 전환점을 대표하는 작곡가들

수록된 다섯 작곡가는 저마다 서양 음악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대표한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는 르네상스 폴리포니의 완성자로, 가톨릭 교회 음악의 이상적 전범을 확립한 인물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 음악 개혁의 중심에 서며 '교회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는 바로크 초기 로마 악파의 일원으로, 시스티나 예배당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의 '미제레레'는 당대 교황청이 독점적 연주권을 주장할 만큼 신성시된 작품이었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바로크 음악의 최고봉으로, 대위법과 화성의 완벽한 통합을 이루어낸 음악사의 거인이다. 그의 합창 음악은 종교적 신앙과 음악적 논리가 불가분하게 결합된 독보적 세계를 구축했다.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은 오라토리오 장르를 영어권 대중에게 확산시킨 장본인으로, '메시아'는 서양 합창 음악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게 연주되는 작품 중 하나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고전주의 시대 최고의 천재로, 종교 음악에서도 오페라적 생동감과 영적 숭고함을 동시에 구현해낸 유일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수록곡의 에피소드

각 수록곡에는 음악 그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운 탄생 배경이 있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만 연주되도록 교황청이 악보 유출을 엄격히 금지한 곡이다. 그러나 1770년, 로마를 방문한 14세의 모차르트가 단 한 번 듣고 전 악보를 기억으로 복원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이 곡을 더욱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헨델의 '할렐루야'는 1741년 런던 초연 당시 조지 2세가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후 청중도 따라 기립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바흐의 BWV 80 '아인 페스테 부르크(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마르틴 루터의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칸타타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음악으로 구현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의 상징적 작품이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미완성 유작으로, 작곡 도중 사망한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했다. 의뢰인이 자신의 작품으로 행세하기 위해 익명으로 주문했다는 기이한 의뢰 과정도 이 곡을 둘러싼 전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다.

경외, 참회, 감사, 그리고 구원에의 갈망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장르와 시대를 달리하지만 하나의 공통된 충동에서 비롯된다. 바로 인간이 신 앞에서 느끼는 경외, 참회, 감사, 그리고 구원에의 갈망이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에 기반한 깊은 참회의 고백이며, 팔레스트리나의 모테트는 성스러운 절기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자비를 동시에 노래한다. 헨델의 '메시아'는 구약의 예언에서 신약의 성취까지, 기독교 구원 서사 전체를 장대한 음악 드라마로 펼쳐낸다. 바흐의 합창 음악은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모차르트의 K339는 죽음 앞의 경건함과 삶에 대한 찬미를 교차시킨다.

결국 이 음반 전체는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목소리가 하늘을 향해 보내온 가장 진솔한 언어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낙소스를 인지시킨 음반

1993년 발매된 이 음반은 낙소스가 '저가 클래식 레이블'에서 '신뢰받는 음반사'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립자 클라우스 하이만(Klaus Heymann)이 내건 기치, 즉 "최고 수준의 녹음을 합리적인 가격으로"라는 철학을 이 음반은 가장 설득력 있게 구현해낸 사례 중 하나였다.

당시 주요 메이저 레이블의 합창 명곡 음반들이 고가에 판매되던 시장 환경에서, 낙소스는 옥스퍼드 카메라타 같은 실력 있는 중견 단체와 협력해 연주 수준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접근 가능한 가격대를 실현했다. 이 음반은 클래식 입문자들이 낙소스를 처음 접하는 관문 음반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레이블의 초기 카탈로그 확장과 인지도 제고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특히 '미제레레'라는 강력한 앵커 트랙을 중심으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엮어낸 편집 방식은, 이후 낙소스가 즐겨 활용하는 테마형 컴필레이션 전략의 원형이 되었다.

신체적·영적 공명

장르도, 시대도, 작곡가도 다르지만 이 음반의 13개 트랙에는 하나의 공통된 감각이 흐른다. 바로 인간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수직적 울림, 즉 화음이 공간을 채울 때 생겨나는 신체적·영적 공명이다.

오케스트라나 독주 악기와 달리 합창은 다수의 인간 목소리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호흡하며 소리를 만든다.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그 합창 고유의 힘, 즉 여럿이 하나가 되는 순간의 숭고함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다. 팔레스트리나와 알레그리의 섬세한 폴리포니, 헨델의 폭발적인 에너지, 바흐의 정교한 대위법, 모차르트의 서정적 선율이 모두 이 '합창이라는 언어'의 서로 다른 방언들이다.

이 음반 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나면, 수백 년을 가로질러 인간이 목소리로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아직도 유효한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이 음반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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