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브리튼 현악사중주 전집, 엠페러 콰르텟이 완성한 영국 현대음악의 초상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3-20 04:32:46

BIS 레이블, 3SACD 박스세트로 벤자민 브리튼 현악 실내악 총망라 브리튼 현악사중주 전집. 사진 | BIS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스웨덴의 명문 클래식 레이블 BIS가 발매한 3장짜리 SACD 박스세트는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의 현악 실내악 작품을 사실상 전곡 망라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번호가 붙은 현악사중주 3곡은 물론, 10대 소년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작곡된 습작·소품들까지 아우름으로써, 브리튼의 음악적 성장 궤적을 한 장의 지도처럼 펼쳐 보인다. 총 수록 시간 3시간 20분 10초에 달하는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브리튼 연구자는 물론 영국 근현대 음악 팬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레퍼토리의 결정판으로 자리매김한다.

엠페러 콰르텟

이 전집의 연주를 맡은 엠페러 콰르텟(Emperor Quartet)은 영국 현대 실내악 연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앙상블이다. 이들은 브리튼의 음악을 단순히 '영국적 서정'이라는 틀로 박제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마다 서로 다른 양식적 언어—낭만주의의 잔향, 신고전주의적 절제, 쇤베르크 이후의 무조적 긴장—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각 시기의 브리튼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낸다.

특히 성숙기의 걸작인 현악사중주 3번(Op. 94)에서 엠페러 콰르텟은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브리튼이 생의 마지막 해에 완성한 이 곡의 종악장은 죽음을 앞둔 작곡가의 고요하고도 비장한 내면을 섬세한 보잉과 정교한 앙상블로 그려낸다. 반면 10대 시절의 현악사중주 F장조(1928)와 미니어처 모음곡(1929)에서는 청년 브리튼의 활기와 기교적 야심을 생기있게 살려내, 음반 전체가 하나의 성장 서사로 완결된다.

브리튼, 20세기 영국음악의 총아

벤자민 브리튼은 헨리 퍼셀 이후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전반 유럽 음악계가 무조주의와 전위의 격랑에 휩쓸릴 때, 브리튼은 조성 체계를 근간으로 삼으면서도 그 안에서 날카로운 불협화음, 민요적 선율, 낭만적 감수성이 빚어내는 독자적 언어를 구축했다. 그는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 1945)’로 영국 오페라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전쟁 레퀴엠(War Requiem, 1962)’으로 반전 휴머니즘의 정수를 선보였다.

실내악 분야에서 브리튼은 현악사중주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를 토로했다.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무대에서는 공적 언어를 구사했던 그가, 사중주 형식 앞에서는 사적이고 실험적인 탐구를 아끼지 않았다. 폴리포니와 파사칼리아(passacaglia)에 대한 집착, 민요 선율의 변형 기법, 드라마틱한 대위법적 구조 등이 이 박스세트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난다.

수록곡의 작곡 배경

현악사중주 F장조(1928)는 브리튼이 불과 열다섯 살에 쓴 작품으로, 당시 그의 스승이었던 작곡가 프랭크 브리지(Frank Bridge)의 영향 아래 완성됐다. 브리지는 브리튼에게 전통 형식의 엄격함과 현대적 화성 언어를 동시에 가르쳤으며, 이 사중주에는 그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니어처 모음곡(1929)과 랩소디(1929), 콰르텟티노(1930), 판타지 F단조(1932) 등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의 소품들은 브리튼이 왕립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 재학 시절 쓴 습작들이다. 이 작품들은 미완성이거나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사후에 재조명받았으며, 천재 소년의 왕성한 실험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 개의 디베르티멘티(Three Divertimenti, 1936)는 이 시기 브리튼이 즐겨 참조했던 하이든·모차르트적 유머와 가벼움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신고전주의의 세례를 받은 젊은 브리튼이 형식의 유희를 즐기는 면모가 두드러진다.

현악사중주 1번(D장조, Op. 25, 1941)은 브리튼이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 완성됐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창작에 몰두하던 브리튼의 향수와 불안이 작품 전반의 서정적 긴장감 속에 녹아 있다.

현악사중주 2번(C장조, Op. 36, 1945)은 헨리 퍼셀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으로, 초연 당시 퍼셀의 음악을 깊이 연구하던 브리튼의 역사의식이 선명하게 반영돼 있다. 웅장한 샤콘느로 마무리되는 종악장은 영국 바로크 음악에 대한 경의이자 브리튼 자신의 작곡가적 선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현악사중주 3번(Op. 94, 1975)은 브리튼이 심장 수술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가운데 완성된 사실상의 유작이다. 그는 이 곡을 완성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베네치아에서 영감을 받은 종악장 '라 세레니시마(La Serenissima)'—'가장 고요한 것'이라는 뜻의 베네치아의 별칭—는 물 위에 부유하는 도시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조용히 발을 담근 채 작별을 고한다.

사적 언어의 공적 완성

이 박스세트가 담아낸 브리튼의 현악 실내악 세계는 한마디로 '사적 언어의 공적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소년 시절의 습작에서부터 임종 직전의 유작에 이르기까지, 브리튼은 현악사중주라는 형식을 통해 시대의 불안, 고국에 대한 그리움, 사랑의 상실, 죽음과의 화해를 기록했다. 그것은 위대한 공적 예술가의 이면에 존재했던 한 인간의 가장 솔직하고 취약한 고백이었다.

엠페러 콰르텟은 그 고백의 언어를 명료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BIS의 이 3SACD 박스세트는 단순한 음반을 넘어, 브리튼이라는 작곡가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길잡이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klifejourney2025@gmail.com

[ⓒ K라이프저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