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이주상 기자] 오는 21일, 세계적 클래식 레이블 데카 클래식스(Decca Classics)를 통해 이례적인 음반 하나가 발매된다.
제목은 '라이프 이즈 어 드림(Life Is A Dream)'. 표지에는 지휘봉이나 오선지가 아니라, 눈을 지그시 감은 한 노배우의 얼굴이 담겼다. 올해로 아흔을 앞둔 명배우 앤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가 평생 써 온 자작곡들을 처음으로 정식 앨범으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이 음반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배우가 만든 부업' 이상이다. 홉킨스에게 음악은 연기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의 언어였다. 그는 이번 발매를 앞두고 "음악은 내 첫 번째 소망이자 첫 번째 갈망이었다"며 "나는 평생 곡을 써왔고, 그중 몇몇은 수십 년째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소회를 전했다.
데카라는,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레이블이 여든여덟 노배우의 자작곡에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최상급 진용을 붙여준 것 자체가, 이 음반이 단순한 이벤트성 기획이 아니라 진지한 음악적 평가 위에서 성립됐다는 신호로 읽힌다.
두다멜의 지휘, 필하모니아의 소리, 그리고 두 명의 비르투오소
연주의 중심에는 그래미 수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런던의 명문 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있다. 두다멜은 이번 협업에 대해 "홉킨스는 창작의 목소리가 어느 한 매체에 갇히지 않는 몇 안 되는 예술가"라며, 그의 스크린 연기를 정의해 온 상상력과 인간미, 감정적 진실성이 음악에도 그대로 스며 있다고 평했다. 그는 홉킨스의 곡들을 들으며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짜임, 그리고 곡 전체를 관통하는 경이로움에 놀랐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카라카스 출신의 아르헨티나계 피아니스트 세르히오 티엠포와 베네수엘라 출신 첼리스트 그레고리오 니에토가 솔로이스트로 참여해 곡마다 섬세한 표정을 더했고, 합창이 필요한 대목에는 영국의 합창 단체 바흐 콰이어(The Bach Choir)와 윈체스터 대성당 소년 합창단이 힘을 보탰다. 녹음은 지난 4월 런던 알렉산드라 팰리스에서 진행됐다. 홉킨스는 이들과의 작업을 두고 "존경받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비르투오소 솔리스트들과 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특권이었다"며 두다멜의 지휘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표했다.
배우 홉킨스가 아닌, 작곡가 홉킨스라는 자리
앤소니 홉킨스는 이미 60년 넘게 스크린과 무대를 지배해 온 이름이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최근작 '더 파더'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기사(演技史)에 가깝다. 그러나 이번 음반이 조명하는 것은 그 명성 이면에 60년 넘게 병행돼 온 또 하나의 삶, 작곡가로서의 홉킨스다.
영국 웨일스 포트탤벗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과 쇼팽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여섯 살에는 이미 즉흥연주를 했고, 십대 시절에는 지역 연극을 위한 곡을 직접 쓰기도 했다.
정식으로 작곡을 배운 적은 없는 자칭 '독학 작곡가'지만, 2008년에는 스티븐 바턴과 공동 작곡한 '더 마스크 오브 타임'과 '스키조이드 살사'가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초연됐고, 2012년에는 그가 20대에 쓴 '앤드 더 왈츠 고즈 온'을 앙드레 리유와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해 클래식 브릿 어워드 올해의 음반상을 받기도 했다. 즉, 이번 음반은 갑작스러운 외도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이어진 창작 활동의 결산인 셈이다.
웨일스의 소년, 그리고 아버지의 빵집에서 시작된 선율들
수록곡들의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이 음반이 왜 홉킨스에게 '가장 개인적인 음악 프로젝트'로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첫 싱글로 공개된 '브래큰 로드(Bracken Road)'는 3부작 모음곡 '1947: 솔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의 2악장으로, 1940년대 웨일스 남부 마검(Margam)에서 보낸 어린 시절, 집 주변의 거리와 초원, 농지와 산을 떠올리며 쓴 곡이다.
홉킨스는 이 선율을 1963년 리버풀 플레이하우스에서 젊은 배우로 일할 당시 처음 구상했다고 밝혔는데, 동료들이 오기 전 무대 뒤 낡은 피아노로 즉흥연주를 하던 중 떠오른 멜로디였다고 한다. 완성된 편곡에는 해리 제임스 오케스트라, 재키 글리슨의 관현악 발라드, 그리고 에드워드 엘가 교향곡 1번의 느린 악장이라는, 그가 젊은 시절 즐겨 들었던 음악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
또 다른 수록곡 '마이 파더랜드(My Fatherland)'는 웨일스 전통 선율에 뿌리를 둔 곡으로, 그는 이 곡을 두고 "나는 빵집을 하던 아버지의 아들"이라며 자신의 소박한 출신에 대한 헌사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영화, 그의 아내, 그리고 조카를 향한 헌정곡들이 앨범 곳곳에 배치돼 있어, 트랙 하나하나가 홉킨스 개인사의 한 페이지처럼 읽힌다.
스크린의 서사성을 오케스트라로 옮기다
수록곡들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결국 홉킨스라는 한 인간의 정서적 지형도다. 데카 측은 이번 음반이 "영화적이고 감정적이며 풍성하게 편곡된 작품들을 통해 수십 년과 여러 예술 형식을 넘나든 창작의 삶을 들여다보는 내밀한 창"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그는 배역 준비 과정에서도 음악을 도구로 삼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연기할 때는 애런 코플런드를 즐겨 들었다고 밝힌 바 있으며, 본인의 성격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유쾌하지만 웨일스에서 보낸 유년기에서 비롯된 멜랑콜리한 정서가 내면에 자리한다고 언급했다.
본인이 사랑한다고 밝힌 본 윌리엄스와 엘가의 음악이 지닌 멜랑콜리함과 전원적 색채는, 이번 음반의 여러 트랙에서도 짙게 감지된다. 결국 '라이프 이즈 어 드림'은 웨일스의 산과 들, 아버지의 빵집, 그리고 무대 뒤에서 흥얼거리던 젊은 배우의 기억을 오케스트라의 언어로 다시 쓴, 한 편의 음악적 자서전에 가깝다.
아직 쓰이지 않은 평가, 그러나 이미 시작된 기대
정식 발매가 열흘 넘게 남은 시점이라 평단의 공식 리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선행 공개된 싱글 '브래큰 로드'를 두고 CNN을 비롯한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소식을 다뤘고, 데카 클래식스 회장 로라 몽크스는 런던 녹음 현장에서 두다멜과 필하모니아가 홉킨스의 곡을 실제 소리로 구현해내는 순간을 "일생에 한 번뿐인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두다멜 역시 홉킨스가 "이야기꾼의 마음과 시인의 직감으로 음악에 접근하는" 예술가라 평하며, 그의 곡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공명하는 사운드 세계를 빚어낸다고 짚었다. 발매 이후 그라모폰(Gramophone) 등 전문 매체들의 정식 평가가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한 세기 가까운 인생을 압축한 이 음반이 클래식 씬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이제부터의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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