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토머스 탈리스 ‘Spem in alium’, 40개의 목소리로 울린 신의 찬가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08 16:25:24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2005년, 세계 클래식 음반계는 한 작곡가의 탄생 500주년을 조용하지만 경건하게 기념했다. 토머스 탈리스(Thomas Tallis, c.1505~1585)— 영국 르네상스 성악 다성음악의 최고 거장이자, 그의 제자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와 함께 영국 음악사의 황금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Naxos가 이 기념의 해에 내놓은 음반은 제레미 서머리(Jeremy Summerly)가 이끄는 옥스퍼드 카메라타(Oxford Camerata)의 연주로, 탈리스의 가장 방대하고 야심찬 두 작품— 40성부 모테트 ‘Spem in alium’과 ‘Missa Salve intemerata’를 중심에 놓는다. 이 음반은 단순한 기념 프로젝트를 넘어, 탈리스라는 거인의 음악적 세계를 가장 충실하게 조명한 디스코그래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탈리스, 그는 영국 음악사의 어디에 서 있는가
토머스 탈리스는 1505년경 영국에서 태어나 1585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영국 종교개혁의 격동 그 자체였다. 헨리 8세의 가톨릭 교회 결별, 에드워드 6세의 개신교 강화,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고, 엘리자베스 1세의 국교회 확립— 네 명의 군주 아래에서 탈리스는 한 번도 왕실 예배당(Chapel Royal)의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 자리를 잃지 않았다.
이 경이로운 생존과 적응의 역사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어떤 전례 언어로도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그의 음악적 신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음악사적으로 탈리스는 중세 후기 대위법 전통과 르네상스의 성숙한 다성 어법을 잇는 교량이다. 그가 구축한 성부 운용의 자유로움과 규모는 당대 유럽 어느 작곡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특히 ‘Spem in alium’은 16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단일 악장 성악 작품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탈리스가 없었다면 버드도, 나아가 영국 르네상스 성악 음악의 모든 영광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Spem in alium’— 40개의 목소리, 하나의 기도
이 음반의 심장부는 단연 40성부 모테트 ‘Spem in alium’(Spem in alium nunquam habui, "나는 결코 다른 이에게 희망을 두지 않노라")이다. 연주 시간 12분 14초. 그러나 그 12분이 담고 있는 음향적, 구조적 경이로움은 몇 시간의 음악도 따라오기 어려운 것이다. 이 작품의 탄생에 얽힌 에피소드는 여전히 역사가들의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에 따르면, 1570년대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에서 토머스 하워드 4대 노퍽 공작이 이탈리아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의 40성부 모테트를 듣고 영국 작곡가 중 이에 필적하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탈리스가 그 도전에 응답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실제 작곡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이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핵심— 탈리스가 유럽 최고의 다성음악 전통과 당당히 맞섰다는 사실— 은 음악 자체가 웅변한다. 40개의 독립된 성부는 8개의 합창대(각 5성부)로 나뉘어 배치된다. 이상적인 공연은 원형 또는 반원형으로 가수들을 배열하여 청중이 360도 방향에서 음향에 감싸이도록 한다. 작품은 처음 각 합창대가 독립적으로 진입하면서 작은 물결들이 쌓이듯 음향이 축적되다가, 마침내 40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압도적인 순간— "Non est similis tui"(당신과 같은 이가 없도다)— 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화음의 물리적·영적 한계에 도전하는 이 순간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듣는 이를 전율하게 만든다.
‘Salve intemerata’— 젊은 탈리스의 장대한 야심
모테트 ‘Salve intemerata’는 탈리스의 청년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연주 시간 23분 10초로 16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단일 악장 성악 작품 중 하나다. 성모 마리아를 향한 이 장대한 찬가는 헨리 8세 치하의 가톨릭 전례 전통 속에서 탄생했으며, 젊은 작곡가가 자신의 모든 대위법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만들어 낸 야심작이다.
‘Missa Salve intemerata’는 같은 선율 소재를 파로디 기법(parody technique)으로 발전시킨 미사 통상문 설정으로, 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아뉴스 데이의 네 악장으로 구성된다. 두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이 음반의 프로그램 구성은, 동일한 음악적 씨앗이 모테트와 미사라는 두 형식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꽃피는지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서머리와 옥스퍼드 카메라타 — 작은 앙상블, 큰 음향
제레미 서머리가 1984년 창단한 옥스퍼드 카메라타는 영국 고음악 앙상블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단체다. 소규모 전문 성악가들로 구성된 이 앙상블의 특기는 중세와 르네상스 레퍼토리의 정밀하고 투명한 재현에 있다. 40성부라는 전례 없는 규모의 ‘Spem in alium’을 소규모 앙상블이 녹음할 때 가장 큰 도전은 각 성부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음향의 유기성을 살리는 것이다.
서머리는 이 과제를 런던 올 할로스 교회(All Hallows, Gospel Oak)의 자연스러운 잔향을 활용하여 해결한다. 각 성부가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용해되면서 40성부의 거대한 음향 건축이 비좁지 않게 숨 쉬도록 한 녹음 미학은 이 음반의 큰 강점이다. 또한 서머리는 이 음반의 모든 악보를 직접 교정·재구성했으며, 부클릿 해설도 집필했다— 학자적 엄밀함과 연주자적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된 총체적 작업이다.
같은 기도, 다른 목소리들
‘Spem in alium’은 현재 수십 종의 음반이 존재하는 경쟁적인 레퍼토리다. 피터 필립스(Peter Phillips)가 이끄는 탈리스 스콜라스(The Tallis Scholars)의 녹음은 이 분야의 절대적 기준점이다. 탈리스 스콜라스는 각 성부를 한 명씩의 독창자로 채우는 방식을 택하여, 40개 목소리의 완벽한 독립성과 성악적 투명도를 극한까지 구현한다. 결이 곱고 유리처럼 맑은 음향은 이 작품의 다성적 건축미를 가장 세밀하게 드러낸다.
해리 크리스토퍼스(Harry Christophers)와 더 식스틴(The Sixteen)의 버전은 좀 더 풍성하고 따뜻한 화음을 지향한다. 성부당 복수의 가수를 배치하여 더 두터운 음향 질감을 만들어 내며, 작품의 장엄함과 공간감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폴 맥크리시(Paul McCreesh)와 가브리엘리 컨소트(Gabrieli Consort)의 접근은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한다. 성악과 함께 기악을 가미하여 르네상스 궁정 연주 관행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최대한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세 경쟁작들과 비교할 때, 서머리와 옥스퍼드 카메라타의 Naxos 버전은 학문적 정확성과 음악적 감동의 균형, 그리고 접근 가능한 가격이라는 Naxos의 레이블 철학이 결합된 결실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녹음은 특히 ‘Missa Salve intemerata’를 모테트 원형과 함께 수록한 프로그램 구성에서 다른 경쟁 음반들과 차별화된다.
500년의 침묵을 깨운 40개의 목소리
토머스 탈리스는 생전에 이미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았지만, 이후 수백 년간 그의 음악은 학자들과 소수의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명맥을 유지했다. 20세기 고음악 부흥 운동이 비로소 그를 역사의 서랍에서 꺼내어 연주 무대 위에 올려놓았고, 이 음반은 그 부흥의 성과를 탄생 5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 시점에 결산한 기록이다.
40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기도로 수렴하는 ‘Spem in alium’의 그 순간— "나는 결코 다른 이에게 희망을 두지 않노라"— 은 500년 전 튜더 왕조 궁정의 예배당에서 처음 울렸을 때와 다름없이, 지금 이 음반을 통해서도 우리의 심장을 멎게 한다. 음악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 12분 14초가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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