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북유럽 동화 화가 욘 바우에르의 1915년작 수채화, 그 안에 스며든 매혹과 불안 그리고 짧았던 생의 그림자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28 16:08:04

욘 바우에르의 '레나와 기사의 춤'(전도)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스웨덴의 화가 욘 바우에르(John Bauer, 1882~1918)가 1915년에 그린 수채화 '레나와 기사의 춤'(Lena och riddaren dansa)은 한 쌍의 젊은이가 숲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그림 속 소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다. 기쁨의 춤이라기보다 무언가를 견디는 사람의 몸짓에 가깝다. 이 어긋남이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숲에서 태어나 물에서 멈춘 생

바우에르는 스웨덴 남부 옌셰핑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스톡홀름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학생 시절부터 잡지와 책의 삽화 일을 맡았고, 1906년에는 같은 화가 에스테르 엘크비스트와 결혼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초기 회화를 익혔고, 라플란드에서는 사미 문화의 색채와 장식을 눈에 담았다. 그 경험은 그의 동화 세계에 이국적인 깊이를 더했다.

그를 대중에게 알린 것은 1907년부터 매해 발간된 스웨덴 민담 선집 '톰타르와 트롤 사이에서'(Bland tomtar och troll)의 삽화였다. 이 책에서 그가 그린 공주와 트롤, 숲의 정령들은 스웨덴 사람들이 옛이야기 속 존재를 머릿속에 그리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18년 배를 타고 벳테른 호수를 건너다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창작의 정점에서 끊긴 삶이라는 사실은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따라붙는다.

국민 낭만주의의 끝자락에서 만든 독자적 문법

미술사에서 바우에르는 20세기 초 스웨덴 국민 낭만주의의 흐름 위에 놓인다. 동시대의 카를 라르손이 밝고 따뜻한 일상을 그렸다면, 바우에르는 전승과 자연 속의 어둡고 신비로운 면을 택했다. 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구성, 아르누보의 유려한 선, 북유럽 민속의 정서를 하나로 엮었다. 그림책 삽화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으로 미술관 수집 대상이 된 이유다. 그의 작품은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예테보리 미술관, 말뫼 미술관, 옌셰핑 도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잎마다 새가 깃든 나무, 그 아래의 붉은 옷

'레나와 기사의 춤'은 종이에 수채, 흰색 하이라이트, 먹물, 연필로 그린 26×28.5센티미터의 소품이다. 바우에르는 W. E. 비외르크의 동화 '황금 열쇠'(Guldnycklarna)를 위한 삽화로 이 그림을 1915년에 제작했다. 이 그림은 같은 해 스웨덴 일반미술협회(Sveriges Allmänna Konstförening)에서 전시된 기록이 있고, 1934년 스톡홀름의 왕립미술아카데미 추모전에도 출품되었다.

화면 대부분을 덮은 거대한 나무는 검푸른 잎덩이 사이로 가늘고 흰 새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다. 몇 마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오른쪽 아래에서는 푸른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다. 왼쪽에는 별 하나가 희미하게 뜬 황토빛 하늘이 남아 있다. 발밑에는 은방울꽃을 닮은 흰 꽃들이 덩굴처럼 피어 있다.

두 인물은 화면 아래쪽에 작게 놓였다. 소녀는 크림빛 드레스를 입고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붉은 줄무늬 튜닉과 늘어진 붉은 소매를 두르고 분홍 모자를 썼으며,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소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기이할 만큼 길고 가느다란 회색 다리는 바우에르 인물의 특징이다.

평면 속에 쌓아 올린 밤의 깊이

바우에르의 화법은 원근법으로 공간을 파고들기보다 색과 무늬로 화면을 짜는 쪽에 가깝다. 이 그림에서 나뭇잎은 물결 모양의 작은 단위가 겹치며 하나의 거대한 직물을 이룬다.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찍은 새들이 리듬을 만든다. 검푸른 덩어리와 황토빛 하늘의 보색 대비는 색의 온도를 극단으로 갈라놓는다. 인물의 붉은색과 소녀의 백색이 그 사이에서 유일한 온기와 빛으로 선다.

바우에르는 작은 스케치를 거듭 발전시켜 그림을 만드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모티프가 여러 크기와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도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화면 안의 요소들이 정밀하게 맞물린 결과물로 보인다.

춤이라는 이름의 침묵

이 그림이 남기는 감정은 환희와 불안 사이 어딘가에 있다. 붉은 기사의 들린 팔은 축제의 몸짓 같지만, 소녀의 숙인 얼굴과 짙은 숲은 그 축제가 마냥 안전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두 사람이 맞 잡은 손들이 감상자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준다. 나무는 두 사람을 보호하듯 덮고 있으나 동시에 짓누르는 것처럼도 보인다. 새들은 축복의 비인지 침묵하는 관객인지 알 수 없다.

작은 인물이 거대한 자연 속에 놓인 구도는 인간이 세계 앞에서 느끼는 경외와 두려움을 함께 전한다. 동화의 세계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힘 앞에서의 떨림을 품고 있음을 이 그림은 보여준다. 이 작품이 어른의 눈으로도 오래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롤의 얼굴을 빚은 손

바우에르의 영향은 스웨덴 안에서 특히 분명하다. 경매회사 부코스키스(Bukowskis)는 그가 스웨덴 옛이야기와 북유럽 민담 속 존재를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그의 숲과 트롤, 공주는 오늘날에도 스웨덴 아동 문화와 판타지 이미지의 원형처럼 재생산된다.

현대 일러스트레이션과 판타지 미술에서도 그의 그림은 자주 참조된다. 장식적인 평면 구성, 자연과 인물의 관계, 신비로운 분위기는 후대 삽화가와 판타지 시각 문화에 낯설지 않은 언어가 되었다. 이 작품의 이미지가 J. R. R. 톨킨 시집 관련 도판에도 쓰인 사실은 그의 그림이 국경을 넘어 통용되는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욘 바우에르의 '레나와 기사의 춤'(부분)

동화의 값, 시장의 숫자

작가의 인기는 경매 시장에서도 뚜렷하다. 2023년 6월 우플란드 경매소(Uppsala Auktionskammare)에서는 1913년작 수채 '튜브스타르 공주'가 추정가 250만~300만 크로나의 두 배가 넘는 675만 크로나(한화 약 8억6천만 원)에 낙찰되어 당시 작가 최고가를 세웠다. 2024년에는 부코스키스에서 '동화 속 소녀'(Fairytale Girl)가 875만 크로나(한화 약 12억 원)로 새 기록을 썼다고 보도되었다. 2026년 6월에도 수채 '넓은 세상으로'(Out into the Wide World)가 510만 크로나(한화 약 7억 원)에 팔렸다. 한화로는 수억 원대에서 10억 원을 웃도는 규모다. 

'레나와 기사의 춤' 역시 시장에 나온 적이 있다. 부코스키스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69년 경매에서 거래되었고, 이후 개인 소장을 거쳐 2014년 12월 부코스키스에 다시 출품되었다. 뮤추얼아트는 이 거래가 추정가보다 크게 웃돈 것으로 기록했으나 낙찰가는 회원 전용 정보라 확인하지 못했다. 작가 작품의 시장 가격은 크기, 주제, 이력,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대표 주제인 공주와 트롤 그림에 프리미엄이 붙는 경향이 뚜렷하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원화가 한정된 데다 그림 크기가 작아서 희소성이 가격을 밀어 올린다.

짧은 생이 남긴 긴 여운

바우에르는 서른다섯 해를 살았고, 그가 남긴 그림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계속 새로운 관객을 얻고 있다. '레나와 기사의 춤'은 그 여운을 압축한 한 장면이다. 숲의 정적 속에서 춤추는 두 인물을 바라보며 관객은 기쁨과 상실이 한 몸으로 있는 순간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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