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비발디의 '숨겨진 얼굴'을 완성한 11장의 기록 — 하이페리언의 비발디 聖樂曲集!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8-01 14:33:51

하이페리언의 비발디 성악곡집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대표되는 안토니오 비발디에게는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바로 종교음악 작곡가로서의 비발디다. 하이페리언(Hyperion) 레이블이 로버트 킹(Robert King)과 킹스 콘소트(The King's Consort)를 앞세워 완성한 11장짜리 박스 세트 '비발디: 컴플리트 새크리드 뮤직(Vivaldi: The Complete Sacred Music)'은 이 잊혀진 얼굴을 온전히 복원해낸 기념비적인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20세기에야 비로소 빛을 본 비발디의 종교음악

이 음반의 가치는 무엇보다 '희귀성'에서 나온다. 비발디의 종교 성악곡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거의 200년 가까이 잊혀 있었다. 1926년 토리노 인근에서 방대한 양의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그가 남긴 약 50여 편의 종교음악이 세상에 드러났고, 이 발굴은 비발디 연구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발견이 있기 전까지 비발디가 방대한 종교 성악곡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킹과 킹스 콘소트는 1994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이 방대한 유산을 체계적으로 완주해 담아냈고, 이 전집은 지금까지도 비발디의 종교음악을 가장 폭넓게 조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수록곡은 널리 알려진 '글로리아(Gloria)'는 물론, '베아투스 비르(Beatus vir)', 애절한 정서가 깊게 배어 있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극적인 '딕시트 도미누스(Dixit Dominus)', 그리고 비발디의 유일한 현존 오라토리오인 '유디타 트리움판스(Juditha Triumphans)'까지 아우른다. 이는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여성 음악가들을 위해 쓰인 초기작부터 비발디 중기의 한층 기교적인 작품까지, 그의 종교음악 양식이 지닌 폭넓은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로버트 킹과 킹스 콘소트, 그리고 화려한 솔로이스트 라인업

지휘자 로버트 킹은 케임브리지 세인트존스 칼리지 합창단 출신으로, 20세의 나이에 시대악기 오케스트라 킹스 콘소트를 창단한 이래 바로크 음악 해석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킹스 콘소트는 1987년부터 하이페리언과 전속 관계를 맺고 수십 장의 앨범을 녹음했으며 국제적으로 여러 차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비발디 전집 역시 그가 이끈 하이페리언 시절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솔로이스트 명단 또한 이 음반의 무게를 더한다. 수전 그리튼, 캐롤린 샘슨, 나탈리 슈츠만, 앤 머리, 캐서린 덴리, 데버라 요크, 힐러리 서머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성악가들이 총출동했다. 특히 훗날 세계적인 스타 메조소프라노로 성장한 조이스 디도나토도 이 시리즈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킹스 콘소트 합창단 역시 비발디 특유의 화려한 대위법과 급격한 다이내믹을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며 전집 전반에 통일된 완성도를 부여한다.

비발디, '사계'의 작곡가를 넘어선 음악사적 위치

비발디는 18세기 초 바로크 협주곡 양식을 정립한 작곡가로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협주곡 어법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여러 작품을 편곡해 연구할 정도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은 오랫동안 '기악 작곡가'로서의 비발디에게만 집중돼 있었다. 20세기 초 비발디 부흥이 시작됐을 때도 학자와 음악가들의 관심은 주로 협주곡에 쏠려 있었다.

이 음반이 조명하는 성악 작곡가 비발디는, 그가 베네치아의 여성 음악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에서 바이올린 교사이자 합창 지휘자로 오랜 세월 몸담았던 이력과 맞닿아 있다. 이 전집은 '사계'의 작곡가라는 익숙한 이미지 너머, 종교음악사에서도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비발디의 온전한 초상을 완성한다.

'유디타 트리움판스'에 새겨진 전쟁과 신앙의 알레고리

수록곡 가운데 가장 극적인 배경을 지닌 작품은 오라토리오 '유디타 트리움판스'다. 이 곡은 1716년 오스만 제국의 코르푸 섬 침공에 맞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위촉된 작품으로, 그해 여름 코르푸 공방전에서 요한 마티아스 폰 슐렌부르크 백작의 지휘 아래 거둔 승리를 배경으로 한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대 과부 유디트의 성서 이야기는, 유디트를 베네치아로, 홀로페르네스를 오스만 술탄으로 대비시키는 정치적 알레고리로 재해석됐다.

이 작품은 비발디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여성 음악가와 성악가들을 위해 작곡됐으며, 남성 배역과 4부 합창까지 모두 이 여성 음악가들이 소화해냈다. 피에타는 베네치아에 있던 네 곳의 여성 보호시설 중 하나로, 단원들의 뛰어난 연주 수준 덕에 이탈리아 각지는 물론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이는 명소로 명성을 떨쳤다. 비발디는 이 작품에서 초기 클라리넷, 만돌린, 테오르보 등 이례적으로 다채로운 악기 편성을 동원해 자신의 기악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여성 비르투오소의 목소리로 완성된 신앙과 정치의 이중주

'유디타 트리움판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앙심을 넘어선다. 표면적으로는 성서 속 여성 영웅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 앞에서 신앙과 조국을 지켜낸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당대 유럽에서 이례적이었던 여성 연주자들의 기교와 표현력을 세상에 증명하려는 목적도 품고 있었다.

다른 수록곡들, 예컨대 그리스도의 수난을 애도하는 '스타바트 마테르'나 시편에 곡을 붙인 '베아투스 비르' 등은 이와 대조적으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전집을 통해 듣는 이는 비발디가 종교음악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도 국가적 서사와 개인적 신앙심이라는 서로 다른 두 목소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넘나들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평단의 오랜 지지 

이 시리즈는 발매 당시부터 평단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베네치아 비발디 인스티튜트로부터 '1995년 최고의 비발디 레코딩'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여러 작품이 그라모폰(Gramophone) 어워드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의 음반 전문지 팡파르(Fanfare)는 이 전집을 두고 궁극의 비발디 앤솔러지라 평하며 하이페리언 특유의 따뜻하고 비할 데 없는 녹음 음질을 함께 언급했고, 비비시 뮤직 매거진(BBC Music Magazine)과 그라모폰 역시 연주와 음질 모두에서 모범적인 완성도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뮤직웹(MusicWeb)의 한 평론가는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로버트 킹과 그의 연주진이 들려주는 명료하고 흠결 없는 완성도로 계속 듣게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비발디: 컴플리트 새크리드 뮤직'은 단순한 전집 녹음을 넘어, 20세기에 뒤늦게 발견된 비발디의 또 다른 음악 세계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해석으로 완성해낸 기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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