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20세기 최고의 '노래하는 배우', 표도르 샬리아핀의 ‘Song Book’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8-29 04:32:52
[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오스트리아의 레이블인 프라이저 레코드(PREISER RECORDS)가 발매한 'Feodor Chaliapin Song Book(electrical recordings)'은 러시아가 낳은 전설적인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1873~1938)이 전기녹음(마이크로폰을 이용해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고 이를 증폭하여 음반에 기록하는 기술) 방식으로 남긴 가곡·민요·종교음악을 한데 묶은 아카이브 음반이다.
슈베르트의 독일 가곡부터 러시아 민요, 정교회 성가, 영화 '돈키호테' 삽입곡까지 아우르는 이 음반은 오페라 무대를 넘어 '노래하는 배우'로 불렸던 그의 예술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사라져가는 목소리의 마지막 기록
이 음반의 가장 큰 가치는 '전기녹음'에 있다. 1920년대 중반 도입된 전기녹음 기술은 이전 어쿠스틱 녹음보다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와 자연스러운 음색을 포착할 수 있었고, 덕분에 샬리아핀 특유의 깊고 울림 있는 저음과 섬세한 다이내믹 조절이 비교적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오페라 실황이 아닌 리사이틀용 가곡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무대 배역이 아닌 '순수한 목소리'로서 그를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목소리로 짓는 연극
샬리아핀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색의 가수가 아니라, 한 곡 한 곡을 짧은 드라마로 완성하는 해석자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죽음의 노래와 춤' 중 '트레팍'이나 민요 '벼룩의 노래'에서는 가사의 아이러니와 그로테스크한 유머를 목소리 색채만으로 표현하고, 슈베르트의 '도플갱어', '죽음과 소녀' 같은 독일 가곡에서는 정교한 딕션과 절제된 다이내믹으로 서정성과 비극성을 동시에 살려낸다. 오페라 가수의 압도적 성량과 리트 가수의 섬세함을 한 사람이 구현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량은 당대에도 독보적이었다.
밑바닥에서 세계 무대까지
카잔 인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샬리아핀은 지방 극단을 전전하며 무대 경험을 쌓았고, 1892년 트빌리시에서 스승 우사토프에게 무상으로 성악 교육을 받으며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다. 모스크바 마몬토프 오페라와 볼쇼이 극장을 거친 그는 1901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라 스칼라에 데뷔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1913년 디아길레프의 주선으로 런던·파리 무대에서 러시아 민요 독회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가 세계적으로 알린 '볼가강의 뱃노래'는 지금도 그의 이름과 함께 회자된다.
'노래하는 배우'의 발명
그의 최대 유산은 목소리 자체보다 '연기하는 성악가'라는 개념을 정립한 데 있다. 분장과 몸짓, 표정 연기로 배역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그의 방식은 오페라에 사실주의적 연기 전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성악가들의 무대 표현 전반에 영향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러시아 오페라의 대표 배역이 여전히 그의 해석을 기준점으로 삼아 논의된다.
다국어·다장르를 아우르는 목소리
수록곡 목록은 그의 다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탈리아 가곡 '이 어두운 무덤 속에서', 독일 리트, 프랑스풍의 '르 코르'는 물론 러시아 민요와 정교회 전례음악까지 아우르는 구성은 그가 유럽 전역의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인터내셔널한 아티스트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곡들에서는 오페라적 과장을 걷어낸 경건하고 절제된 표현이 두드러진다.
음악비평가들은 그를 음정보다 인물의 심리를 노래한 가수로 꼽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녹음은 성악 교육 현장에서 가사와 감정을 통합하는 모범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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