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망각의 심연에서 귀환한 거장 — 낙소스가 발굴한 바실리 칼라파티의 교향적 유산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23 03:35:41

바실리 칼라파티의 교향곡과 관현악 작품집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역사는 종종 불공평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수제자이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직접 길러낸 스승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름은 음악사 어딘가의 각주 한 줄로만 기억되는 작곡가가 있다.

바실리 파블로비치 칼라파티(Vasily Pavlovich Kalafati, 1869~1942).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사사한 그는, 졸업 후 같은 학교에서 수십 년간 후학을 양성하며 러시아 작곡 교육의 중추로 자리했다. 그의 문하에서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하이노 엘레르 같은 걸출한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정작 칼라파티 자신의 작품은 오랫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이면에 잠들어 있었다.

낙소스(Naxos)가 2020년 발매한 이 음반은 그러한 침묵을 깨는 역사적 복원의 기록이다. 수록된 세 곡 모두가 세계 초연 녹음(World Premiere Recordings)이라는 사실이, 이 음반이 지닌 음악사적 무게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그리스의 뿌리, 러시아의 혼

칼라파티는 1869년, 크림반도의 항구 도시 예브파토리야에서 그리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남다르게 드러낸 그는 1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직접 지도 아래 음악원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 음악계의 핵심 살롱이었던 벨랴예프 서클(Belyayev Circle)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국민악파의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글린카상과 벨랴예프상을 차례로 수상하며 동시대 음악계에서도 확고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잔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벌어진 나치의 레닌그라드 포위전. 그는 그 긴 봉쇄의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1942년 굶주림으로 숨을 거뒀다. 전쟁이 한 인간을 삼켰고, 그의 음악까지 함께 삼켜버렸다.

유일한 교향곡이 전하는 낭만의 서사

이 음반의 중심축은 칼라파티의 단 하나뿐인 교향곡, 'A minor 교향곡, Op. 12'(1899~1912)이다. 약 46분에 걸쳐 네 악장으로 펼쳐지는 이 대작은 러시아 국민악파의 어법을 전통적 교향곡 형식에 정교하게 녹여낸 역작으로, 광폭한 대비와 깊이 있는 낭만적 서정성이 그 뼈대를 이룬다.

작품 전반에서는 칼리닌코프의 유연한 가락, 글라주노프의 당당한 풍모,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내밀한 서늘함이 교차하며 19세기 후반 러시아 교향악의 정수를 다층적으로 응축해 보인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에서 시작해 스케르초, 아다지오를 지나 4악장 피날레에 도달하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낭만주의적 이야기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교향곡이라는 사실이, 되레 이 작품에 더욱 묵직한 무게를 얹는다.

'레장드' — 슈베르트를 향한 만가, 국제 무대의 영광

수록곡 가운데 가장 극적인 탄생 배경을 품은 작품은 '레장드(Légende), Op. 20'(1928)이다.

1928년은 프란츠 슈베르트 서거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컬럼비아가 주도한 국제 작곡 콩쿠르가 빈에서 개최되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완성본이나 그의 낭만적 정신을 계승한 독창적 교향 작품을 공모하는 이 대회에는, 칼 닐센, 도널드 토비 등 당대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 측 심사위원장은 다름 아닌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칼라파티는 대형 교향악단과 합창을 위한 이 교향시를 오롯이 이 콩쿠르를 위해 창작했고, 당당히 2위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레장드'가 택한 방식은 슈베르트의 선율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제들을 소재로 삼아 새롭게 변용하고, 이를 후기 낭만주의의 풍요로운 관현악 색채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합창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황홀하게 음향의 결을 풍요롭게 채운다. 슈베르트를 향한 경건한 애도이자, 거장에 대한 지극히 독창적인 오마주다.

'F장조 폴로네즈' — 글라주노프에게 바친 화려한 헌사

'F장조 폴로네즈, Op. 14'(1905)는 칼라파티가 스승 세대의 거장 글라주노프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폴로네즈 특유의 당당한 리듬감 위에 축제적 생동감이 넘실거리며, 특별히 밝고 화사하게 짜인 관현악법이 작품 전체에 화려한 광채를 드리운다. 7분여의 짧은 시간이지만, 칼라파티의 관현악 어법이 집약적으로 빛나는 소품이다.

아테네 필하모니아와 비론 피데치스 — 헌신적 발굴자들

이 음반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지휘자 비론 피데치스(Byron Fidetzis)와 아테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Athens Philharmonia Orchestra)다.

1945년 그리스 테살로니키 태생인 피데치스는 빈 국립음대에서 첼로와 지휘를 함께 수학했다. 이후 수십 년간 그리스 음악의 가장 헌신적인 옹호자로 활동해왔다. 그는 이미 낙소스를 통한 칼로미리스 음반과 BIS를 통한 스칼코타스 음반으로 그리스 음악 복원에 깊은 족적을 남긴 바 있다. 칼라파티 녹음 역시 그 연장선 위에서, 음악에 대한 강한 신념과 학문적 책임감이 함께 뒷받침된 결과물이다.

2016년 창단된 아테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음악학자 니코스 말리아라스 교수가 회장을, 피데치스가 예술감독을 맡아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리스 작곡가들의 음악을 체계적으로 연주하고 기록하는 것을 창단 사명으로 삼아온 앙상블이다. 칼라파티가 그리스계 작곡가라는 점은, 이 오케스트라가 이번 발굴 프로젝트에 전력을 기울인 배경을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녹음은 2017년 1월과 2018년 11월, 아테네의 아르테미스 콘서트홀에서 이루어졌다.

침묵을 깨는 음반

스트라빈스키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 러시아 국민악파 제2세대의 중심 인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음악은 한 세기 가까이 단 한 장의 녹음도 남기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낙소스의 이 음반은 그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첫걸음이자, 음악사가 마땅히 치러야 했을 빚을 뒤늦게나마 갚는 복원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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