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워터프런트'에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까지…할리우드 황금기의 마지막 얼굴 에바 마리 세인트, 향년 102세로 별세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10-11 17:36:25

에바 마리 세인트

[K라이프저니|이주상 기자] 할리우드 황금기의 마지막 증인으로 불리던 배우 에바 마리 세인트(Eva Marie Saint)가 지난 6일 향년 10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1924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난 고인은 생일의 상징성을 가볍게 여기듯, 화려함보다 작품 자체에 몰두한 배우였다. 지난 7월 4일 102번째 생일을 맞았던 그는 생존한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 중 최고령이기도 했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 말론 브란도와의 즉흥 연기

고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1954년 영화 '워터프런트(On the Waterfront)'였다. 엘리아 카잔(Elia Kazan) 감독은 여주인공 오디션에서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와 즉흥 연기를 해보도록 제안했다. 그는 처음부터 낙점된 후보가 아니었지만, 즉흥 장면을 마친 뒤 카잔 감독은 그에게 역할을 맡겼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열린 제2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여기서 아이를 낳을 것 같아요"…영화계가 기억하는 수상 소감

당시 임신 중이던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로부터 트로피를 건네받은 뒤 객석을 향해 "여기서 아이를 낳을 것 같다"고 미소 지으며 말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화려한 수상 소감이 넘쳐나는 시상식 역사 속에서도 이 순간은 연기가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오래 회자되고 있다. 솔직하고 따뜻하며 약간은 장난기 어린 그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히치콕이 직접 고른 의상…’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팜므파탈

5년 뒤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의 팜므파탈 역에 그를 낙점했다. 수많은 후보를 검토한 끝에 내린 뜻밖의 선택이었다. 히치콕은 이례적으로 의상에도 직접 관여했다. MGM 의상팀이 준비한 옷을 모두 물리고 그와 함께 쇼핑에 나서 장면마다 입을 옷을 직접 골랐다.

사실 고인은 이 배역을 두고 망설였다. 출연을 권한 사람은 방송·무대 연출가였던 남편 제프리 헤이든(Jeffrey Hayden)이었다. 그는 남편의 조언을 따랐고, 캐리 그랜트(Cary Grant)를 유혹하다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는 스파이 역은 이후 이 장르의 기준으로 평가받았다.

65년을 함께한 부부, 그리고 '선택하는 배우'

고인은 1951년 헤이든과 결혼해 2016년 12월 24일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65년을 함께했다.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거리를 둔 채 평온하고 단단한 삶을 이어간 부부였다. 그는 작품 선택에도 신중했다. '엑소더스(Exodus)', '레인트리 카운티(Raintree County)', '그랑프리(Grand Prix)'에 이어 '윈딕시 마트에서 생긴 일(Because of Winn-Dixie)'까지, 히치콕 스릴러에서 가족영화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90대까지 연기를 이어갔다.

"목소리를 낮추고, 연기하는 티를 내지 말고, 애쓰지 마라"

고인은 스타덤보다 눈앞의 장면과 캐릭터, 감독의 목소리에 집중한 배우였다. 브란도에 대해서는 "대단히 섬세한 사람"이라고, 그랜트에 대해서는 "가장 우아한 남자"라고 회상했다. 히치콕이 건넨 연기 조언은 세 가지로 기억했다. 목소리를 낮출 것, 연기하는 모습을 들키지 말 것, 너무 애쓰지 말 것. 그는 이 조언을 평생의 연기 철학으로 삼았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옳은 작품'을 택했고, 많은 말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한마디'를 남겼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에 뉴어크 출신 소녀가 브란도와의 오디션에서 자신만의 연기로 영화의 방향을 바꿔놓았던 시대는 이제 완전한 역사가 됐다.

할리우드는 다시 그와 같은 배우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남는다. 그가 남긴 것은 향수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던 배우의 더없이 훌륭한 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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