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버려진 길' 위의 고요한 서정 — 라파엘리의 1904년 걸작을 읽다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2-19 13:44:54
변방의 시인, 인상주의 시대를 비껴간 거장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장-프랑수아 라파엘리(Jean-François Raffaëlli, 1850-1924)는 19세기말, 20세기초 파리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했던 프랑스 화가다. 인상주의의 황금기를 살아냈으나 그 어느 유파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에드가 드가의 초청으로 1880년과 1881년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한 것이 그의 명성을 드높인 계기가 됐지만, 라파엘리는 인상주의자들의 빛과 색채의 유희보다는 사회적 현실과 인간의 고독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파리 외곽 — 당시 산업화로 급격히 변모하던 방리외(banlieue), 즉 도시 주변부의 황량한 풍경과 그곳을 배회하는 노동자, 부랑자, 소외된 인간군상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이 점에서 라파엘리는 단순한 풍경화가가 아닌 사회적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적 감수성을 동시에 품은 작가로 평가받는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자연주의 문학자들과의 교유가 그의 미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미술사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사실이다.
섬세한 붓질이 빚어낸 쓸쓸한 풍경
1904년 작 ‘버려진 길(The Abandoned Road)’은 현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이 소장하고 있다. 화면은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언덕길을 담고 있다.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나목(裸木)들이 캔버스 양쪽에서 화면을 감싸듯 서 있고, 그 사이로 완만한 능선이 원경의 작은 마을 교회 첨탑을 향해 뻗어 있다. 언덕 중턱에는 두 인물이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어,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라파엘리는 이 작품에서 그 특유의 '타블로(tableau)적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유화 물감에 글리세린과 수지를 혼합한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로 인해 화면 전체가 마치 분필화나 파스텔화처럼 섬세하고 건조한 질감을 띤다. 하늘은 청록과 회백색이 부드럽게 뒤섞이고, 대지는 황갈색과 암갈색의 스펙트럼으로 칠해져 있다. 빛은 대기 속에 산란된 듯 특정 광원 없이 화면 전체에 고르게 스며들어, 그림 전체가 몽환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묘한 균형을 이룬다.
원근법은 고전적이되 단조롭지 않다. 전경의 짙고 거친 덤불에서 중경의 환한 언덕길로, 다시 원경의 마을과 하늘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관람자를 화면 깊숙이 끌어들인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바치는 조용한 헌사
제목 '버려진 길'은 단순한 지리적 묘사가 아닌 강렬한 상징성을 내포한다. 20세기 초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프랑스 사회에서 이처럼 인적이 드문 시골 언덕길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것'이자 '곧 사라질 것'의 표상이었다. 라파엘리는 이 풍경을 통해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조용히 지워져가는 전통적 자연과 삶의 방식에 대한 아련한 애도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감각적 색채 실험과 바르비종파의 자연주의적 서정성이 라파엘리 특유의 사회적 감수성과 결합된 지점에서 탄생한 성숙기의 역작으로 평가된다. 드가가 "그는 파리 외곽의 인생을 진실하게 포착한 유일한 화가"라 극찬했던 라파엘리의 시선은, 이 그림에서 인간이 아닌 풍경 자체를 향해 더욱 깊고 내밀하게 투사되고 있다.
화면 앞에 서면 찾아오는 고독과 위안
이 그림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의 이중주가 찾아온다. 황량함과 고요함, 고독과 평화가 동시에 밀려오는 것이다. 앙상한 나무들은 소멸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그 가지 끝에 잔존하는 붉고 황금빛 잎들은 끝끝내 남은 생명의 온기를 속삭인다. 언덕 위 두 인물은 너무 작아 그들의 표정도, 대화도 들리지 않지만, 바로 그 거리감이 오히려 보는 이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라파엘리의 색채는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절제된 팔레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어느 화려한 인상주의 걸작 못지않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마치 11월의 맑은 오후, 인적 없는 산길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쓸쓸하고도 충만한 적막감. 그것이 이 작품이 주는 가장 순수한 감동이다.
경매 시장에서의 라파엘리 — 저평가된 거장의 재발견
라파엘리는 생전에 살롱 드 파리에서 다수의 메달을 수상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은 당대의 명망 높은 작가였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사의 조명이 모네·르누아르·드가 등 핵심 인상주의자들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그 이름이 퇴색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매 시장에서 라파엘리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회복되고 있다. 크리스티, 소더비, 드루오 등 주요 경매사에서 그의 작품은 주제와 크기, 보존 상태에 따라 대략 수만 달러에서 수십만 달러 수준에서 낙찰되는 흐름을 보인다. 특히 도시 외곽의 인물 군상을 담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버려진 길’과 같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미술관이라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소장한 성숙기 대작의 경우, 단순한 시장 가격 이상의 미술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학자들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라파엘리는 '19세기 말 유럽 사실주의의 빠진 퍼즐 조각'으로 재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학술적 관심 역시 서서히 높아지는 추세다. 언젠가 이 '버려진 길'이 미술사의 주요 도로 위로 다시 불러내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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