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작은 탁자에서 태어난 거인, 피아노 협주곡의 기원을 되찾은 오언 노리스와 소네리의 'The World's First Piano Concertos'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17 10:44:47

에이비(Avie)가 발매한 음반 'The World's First Piano Concertos' 고요비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18세기 런던의 어느 응접실. 다과상으로도 쓰이던 자그마한 탁자 모양 악기 하나가 첼로와 바이올린 두 대와 어우러져 낯선 화음을 빚어낸다.

2003년 영국 레이블 에이비(Avie)가 발매한 음반 'The World's First Piano Concertos'는 바로 이 잊힌 순간, 즉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장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난 자리를 복원한 음반이다.

하나의 악기가 되살린 장르의 기원

이 음반의 가치는 단순한 레퍼토리 발굴을 넘어선다. 영국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오언 노리스는 18세기 후반 유럽 건반 시장을 15년 가까이 장악했던 '스퀘어 피아노(square piano)'를 오랜 기간 연구했고, 그 결과 이 작고 소박한 악기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 사실상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독일 출신 악기 제작자 요하네스 줌페가 1761년 런던으로 건너와 만든 이 탁자형 피아노는, 첼로 한 대와 바이올린 두 대라는 단출한 편성과 만나며 비로소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형식을 완성시켰다. 작은 악기가 큰 장르를 낳았다는 점에서, 이 음반은 음악사의 빈틈을 메우는 사료이자 동시에 음악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결과물이다.

고고학자의 정밀함과 연주자의 생동감

노리스는 이 음반에서 연구자와 연주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영국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Gramophone)은 그가 고증과 정확성을 흥미롭고 생생한 방식으로 결합해냈다고 평했다. 실제로 노리스는 스퀘어 피아노의 구조적 한계, 즉 댐퍼를 페달이 아니라 저음부와 고음부 각각의 손잡이 레버로 조작해야 했던 특성이 오히려 당대 작곡가들의 화성 어법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며 연주에 그 통찰을 그대로 녹여냈다.

바이올린의 모니카 허짓과 에밀리아 벤저민, 첼로의 조지프 크라우치로 구성된 앙상블 소네리(Sonnerie)의 역할도 결정적이다. 소규모 편성은 단순한 축소판 반주가 아니라, 섬세한 소리의 악기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극적인 긴장을 만들어내는 필연적 선택이었다. 벨기에 음악평론가 요한 반 빈은 이들의 연주를 생동감 있고 극적이며 느린 악장에서는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고 평가하면서, 대부분의 중간 악장을 '안단테'로 정확히 짚어내는 템포 선택에 특히 주목했다.

바흐의 아들, 그리고 런던의 동시대인들

수록곡의 작곡가들은 저마다 음악사의 흥미로운 좌표에 서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런던의 바흐'로 불리며 당대 런던 음악계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어린 모차르트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직접 그를 만나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 프리드리히 아벨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함께 런던에서 유명한 연주회 시리즈를 이끌었던 동료 작곡가다. 필립 헤이스는 옥스퍼드 대학 음악박사 출신의 작곡가로, 이 음반에 실린 1769년작 협주곡이 바로 '세계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제시된다. 제임스 후크는 대중적이고 선율이 아름다운 갈랑 양식의 작품으로 당대 폭넓은 인기를 누렸던 작곡가다.

줌페의 발명품이 부른 작곡 열풍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런던의 작곡가들은 줌페의 혁신적인 발명품에 영감을 받아 이 악기를 위한 화려한 작품들을 앞다투어 써냈다. 흥미로운 점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실제로 줌페의 악기 판매 대리인 역할을 하며 공개 연주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장난감 취급을 받았다면 있을 수 없는 행보다.

음반에 담긴 모차르트의 협주곡 역시 특별한 사연을 품고 있다. 이는 모차르트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1766년작 소나타(작품 5-3)를 바탕으로 직접 편곡한 작품으로, 어린 시절 런던에서 바흐를 만난 경험이 훗날 협주곡 작곡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더욱이 이 곡의 녹음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직접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 1777·8년산 악기가 사용됐다. 특히 이 악기가 실제로 소년 모차르트가 접했을 가능성이 있는 악기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작은 울림 속 섬세한 감정의 결

수록곡들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웅장함이 아니라 섬세함이다. 스퀘어 피아노 특유의 여리고 은은한 울림은 격렬한 대비보다는 화성이 공기 중에 오래 머무는 잔향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데 최적화돼 있다. 노리스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음표를 지나치게 촘촘히 쓰지 않고 화성이 흐려지지 않도록 절제했다고 분석하는데, 이는 결국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여백을 두는 작곡 태도로 이어진다. 화려한 기교보다 우아한 선율과 섬세한 뉘앙스를 앞세운 갈랑 양식의 미학이 음반 전체를 관통한다.

단단한 지지, 비평가들의 호평

이 음반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라모폰은 앞서 언급한 대로 고증과 예술성의 결합을 호평했고, 음악 전문 매체 뮤직웹 인터내셔널(MusicWeb International)은 이전까지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협주곡들이 이 녹음을 통해 극적으로 다가왔다며, 잊힌 악기와 훌륭한 음악, 뛰어난 연주가 한데 모인 이 음반을 강력히 추천한다고 밝혔다.

노리스는 이후 모니카 허짓, 소네리와 함께 영국 각지와 미국을 순회하며 이 레퍼토리를 라이브로도 선보였고, 미국 음악 전문지 아메리칸 레코드 리뷰는 그의 연주를 재기 넘치는 지성과 매력이 가득하다고 평한 바 있다.

탁자 위의 피아노에서 시작된 기획

이 음반의 출발점은 학술 연구였다. 노리스는 영국 예술인문연구위원회(AHRB) 펠로십을 수행하며 스퀘어 피아노를 집중적으로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발굴한 레퍼토리를 음반화한 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녹음은 서리주 해치랜즈 파크의 음악실에서 이뤄졌는데, 이곳은 실제로 음반에 쓰인 역사적 스퀘어 피아노들이 소장된 콥 컬렉션(Cobbe Collection)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악기가 있던 바로 그 공간에서, 그 악기를 위해 쓰인 음악을 녹음한다는 기획 의도 자체가 이 음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트랙 구성 역시 이 같은 학술적 태도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곡은 1769년산 복원 악기로 연주됐지만, 모차르트의 협주곡만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서명이 남은 1777·8년산 악기로 따로 녹음해 두 시대, 두 악기의 미묘한 차이까지 청자가 구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단순히 옛 음악을 모아 담은 앨범이 아니라, 악기사와 작곡사, 그리고 연주 관행사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 기획이라는 점에서 이 음반은 여전히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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