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구름 위의 고백 — 아서 해커(Arthur Hacker)가 그린 살과 몽환의 경계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26 09:15:49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1858년 런던 캠든타운, 판화가 에드워드 해커의 아들로 태어난 아서 해커(Arthur Hacker, 1858~1919)는 처음부터 '선'과 '색'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운 화가였다.
열여덟에 로열아카데미 스쿨에 입학한 그는 4년의 수련을 마친 뒤 곧장 파리로 건너가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 문을 두드린다. 이 선택이 그의 화업 전체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나에게서 익힌 프랑스식 아카데미 사실주의는 이후 영국 화단에 낯선 밀도와 육체적 현존감을 가져다주었고, 해커는 종교화와 역사화, 초상화를 넘나들며 빅토리아 후기 화단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는다.
1910년 로열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기까지, 그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이국적 색채 감각을 자신의 화면에 꾸준히 녹여냈다. 흥미로운 것은 말년의 전환이다. 1907년 세밀화가 릴리언 프라이스와 결혼한 뒤, 그는 런던의 안개 낀 거리 풍경과 후기인상주의적 풍경화로 화풍을 옮겨간다. 견고한 아카데미즘에서 출발해 대기와 빛의 순간성으로 나아간 궤적—이는 한 화가가 평생에 걸쳐 '형태'에서 '분위기'로 무게중심을 옮겨간 드문 사례로 기록된다.
안개가 빚어낸 살결 — 화면 위의 두 개의 시간
'Cloud'는 해커의 이러한 이중적 화법이 응축된 작품이다. 구름의 덩어리 위에 반쯤 기댄 여성의 나신이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고, 그 위로 뻗은 팔은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 멈춰 있다. 해커는 이 인물의 피부를 밀랍처럼 매끄러운 황금빛으로 처리하면서도, 배경의 구름은 거칠고 느슨한 붓질로 흩뜨려놓았다. 견고한 인체 데생과 휘발성 강한 대기 묘사가 한 화면 안에서 충돌 없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계산된 대비다. 인물의 살결이 지닌 물질성이 구름의 비물질성과 마주하면서, 그림은 육체와 환상, 현실과 몽상이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살아낸다. 화면 하단 구석에 어렴풋이 자리한 어두운 형상—반쯤 형체를 드러낸 늙은 얼굴—은 이 목가적 장면에 균열을 낸다. 관람자는 화려한 색채에 이끌려 화면에 다가서다가도, 구석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구름이 감춘 것들 — 알레고리로서의 인체
해커가 활동하던 시대, 구름 위에 놓인 여성의 나신은 흔한 도상이었다. 여신이거나 정령이거나, 혹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관념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Cloud'가 지니는 독특함은 이 인물을 신화의 특정 인물로 못 박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목조차 '구름'이라는 자연현상 그 자체를 가리킬 뿐, 서사를 지시하지 않는다.
이는 해커가 종교화와 역사화에서 쌓아온 서사적 재현의 문법을 스스로 걷어낸 지점이자, 형상 자체가 감정과 관념의 매개체가 되는 상징주의적 태도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화면 속 인물은 누구도 아니면서 동시에 잠, 망각, 관능, 혹은 부유하는 의식 그 자체를 표상한다. 구름이라는 소재가 본디 지닌 '형태 없음'의 속성—끊임없이 흩어지고 다시 뭉치는 그 무정형성—은 인간 존재의 불확정성과 겹쳐지며, 이 그림을 단순한 관능적 누드가 아닌 존재론적 질문으로 밀어 올린다.
몽환과 애수 사이 — 관람자의 내면에 남는 잔상
이 그림 앞에 서면 어떤 이중의 감정이 동시에 밀려온다. 하나는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가 주는 나른한 도취감이고, 다른 하나는 구석의 그림자가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불안이다. 해커는 이 두 감정을 화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긴장을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그 이면에 소멸과 불안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뭉쳤다 흐트러지는 구름의 속성처럼.
팔을 뻗은 인물의 몸짓은 갈망처럼도, 체념처럼도 읽힌다.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지만, 그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구름뿐이다. 이 미완의 몸짓이야말로 이 그림이 품은 가장 깊은 정서다—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향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리움.
사라진 이름이 남긴 잔영 — 현대 회화에 드리운 그림자
해커는 오늘날 마니에라풍 상징주의나 라파엘전파만큼 널리 회자되는 이름은 아니다. 당대 비평은 그의 작업이 색채의 화려함과 대중적 감상성에서는 탁월하나 사유의 깊이에서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별개로, 해커가 구축한 '육체의 물질성과 대기의 비물질성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는 화법'은 이후 세대 화가들에게 은밀한 참조점이 되었다.
특히 그가 말년에 보여준 안개와 야경 속 도시 풍경—대기 중의 빛을 인물의 윤곽보다 우선시하는 태도—은 20세기 초 영국 화단이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인상주의적 감각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한 매듭으로 읽을 수 있다. 형체를 흐리고 분위기를 남기는 그의 후기 화법은, 이미지가 서사보다 정서를 우선하게 되는 현대 회화의 감수성과 은밀히 맞닿아 있다.
경매장의 온도 — 잊혀진 거장의 현재가
해커의 작품은 오늘날 경매 시장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두 얼굴을 보인다. 초상화나 소품 장르화는 대체로 수백에서 수천 달러 선에서 거래되며, 최근 집계된 중간값은 약 1,560달러 수준에 머문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급 인물화·알레고리화가 나올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1913년작 대형 인물화 'Vale(작별)'은 소더비 경매에서 4만~6만 달러의 추정가로 출품된 바 있으며, 2025년 본햄스 경매에서는 그의 1917년작 초상화가 저추정가를 크게 웃도는 가격에 낙찰되며 해당 경매의 대표 출품작으로 꼽히기도 했다.
즉 해커는 '꾸준히 거래되지만 폭발적이지는 않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후기 아카데미 화가의 시장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서사성이 강하고 완성도 높은 대형 작품에 한해서는 여전히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Cloud'와 같은 알레고리적 누드화는 바로 이 지점—장식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작품군—에 속하며, 향후 재평가의 여지가 남아 있는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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