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논단] 배우 하영이 남긴 질문들, 혈통에 대한 낙인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8-14 07:23:21

'친일 후손'이라는 굴레, 연좌제인가 역사의식인가 하영. 이주상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K라이프저니|글·사진 이주상 기자] 배우 하영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심코 꺼낸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자랑이, 순식간에 '친일 논란'으로 번졌다.

그의 증조부 안상호는 한국 최초의 개업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왔지만, 동시에 1916년 결성된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의 평의원이었고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진의 일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소속사는 처음엔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했고, 하영 본인도 뒤이어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광복절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이 사건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90여 년 전, 그것도 4대 이전 조상의 행적을 두고 지금의 증손녀가 이토록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연좌제적 정서'의 발현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건을 온전히 '억울한 연좌제'로만 읽는 것 역시 성급하다. 사안을 층위별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연좌제와 역사적 책임은 다른 문제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하영이 안상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법적·제도적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연좌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이는 근대 형사법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것은 전근대적 신분 논리이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의의 방식이 아니다. 이 점에서 "4대 증손녀까지 비판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은 원론적으로 옳다.

다만 이번 논란에서 대중이 실제로 문제 삼은 지점은 안상호의 친일 행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이 드러난 이후 하영 측이 보인 태도였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처음부터 "친일 행적이 있었다니 몰랐다, 알아보고 사과하겠다"고 했다면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소속사는 사료 확인도 없이 '사실무근'이라 단정했다가 하루 만에 말을 바꿨다. 대중이 분노한 것은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 안이함이었다. 즉 이번 사건은 연좌제의 문제라기보다, 위기 대응과 역사 인식의 준비 부족이 낳은 2차 논란에 가깝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 그 부채가 대물림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몇 대를 건너뛴 친일 행적조차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여기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프랑스는 2차 대전 종전 직후 나치 부역자에 대한 '에파라시옹(épuration)'을 통해 수만 명을 재판에 넘기고 상당수를 처벌했다. 물론 그 과정이 완벽하거나 공정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적어도 국가 차원에서 부역의 책임을 명확히 물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매듭을 지었다.

반면 한국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출범시켰으나, 이승만 정권 하에서 경찰 습격과 정치적 압박 속에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와해됐다. 이후 친일 인사 상당수가 오히려 정계와 경제계, 학계의 요직을 차지하며 대물림된 부와 지위를 누렸다.

이 '청산 실패'는 단순히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법적·제도적으로 매듭짓지 못한 역사적 부채는, 그 대신 여론과 대중의 감정이라는 훨씬 즉흥적이고 가혹한 방식으로 뒤늦게 청구서를 날리게 된다. 하영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 연예인' 논란이 반복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를, 대중이 개별 연예인을 상대로 대신 처리하고 있는 셈이다.

강동원·이지아, 그리고 하영 — 무엇이 달랐나

이 지점에서 과거 사례들과의 비교가 유효하다. 배우 강동원은 외증조부 이종만의 친일 행적이 알려졌을 때, 어린 시절부터 미담으로만 들어온 조상의 실체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며 반성하고 공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지아는 한발 더 나아가 조부 김순흥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 사실을 직접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확인하고, 일제강점기에 취득한 재산이라면 국가에 환수돼야 한다는 입장까지 명확히 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사에 대한 감정적 거리와 별개로, 사실관계 앞에서는 회피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영의 경우 결과적으로 비슷한 사과와 반성의 절차를 밟긴 했지만, 초기 대응에서 '사실무근'이라는 성급한 부인이 앞섰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는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 소속사 차원의 위기관리 미숙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의 신뢰를 스스로 깎아 먹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세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원칙이 드러난다. 대중이 용서하지 않는 것은 '친일파 후손'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 앞에서 얼버무리거나 부인하려는 태도라는 점이다.

연예계가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법

그렇다면 앞으로 연예계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첫째, 소속사와 연예인 스스로 방송에서 가족사를 언급할 때는 최소한의 사료 검증을 거치는 관행이 필요하다. 미담으로 전해 들은 가족사가 실제로는 왜곡되거나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이번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둘째, 논란이 불거졌을 때는 사실 확인 이전에 방어적으로 부인하는 대신, "확인해 보겠다"는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지키는 길이다. 하영의 사례가 정확히 그 반대의 교훈을 남겼다.

셋째, 대중과 언론 역시 '친일파 후손'이라는 낙인을 개인의 미래 전체에 대한 심판으로 확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조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찰하는 후손에게 배우로서의 앞날까지 원천 봉쇄하는 것은, 정작 우리가 비판하는 연좌제적 사고와 다르지 않을 위험이 있다. 비판은 태도와 대응 방식에 집중되어야지, 혈통 자체에 대한 낙인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역사청산 미완이라는 뿌리 깊은 문제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개정과 조사위원회 재출범 움직임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개별 연예인을 향한 여론의 심판이 반복되는 것보다, 제도가 늦게라도 제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성숙한 방식이다. 하영 논란이 단발성 가십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뤄둔 역사청산의 숙제를 다시 꺼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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