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논단] 영화 한 편에 갈라진 나라, 박정희와 노무현 사이에서 길을 잃다···과거 성역화 벗고 미래 의제로 돌아와야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10-04 00:50:20
허진호 감독이 8월 10일 열린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주상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K라이프저니|글·사진 이주상 기자] 영화 한 편을 둘러싼 갈등이 극장 밖 정치 공방으로 번지고 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암살자(들)'은 지난달 23일 개봉해 추석 연휴 극장가를 장악했다. 그러나 흥행 소식보다 역사 왜곡 공방이 더 크게 들린다.
논란의 핵심은 결말이다. 수사 당국은 당시 문세광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냈지만, 영화는 배후를 특정하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린다. 연출을 맡은 허진호 감독은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이라는 입장이고, 제작진도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관객과 정치권은 이 열린 결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 등 당시 정권을 겨냥한 암시라고 받아들였다.
고발·상영 중단 요구에 '좌표 찍기'까지
반발은 빠르게 제도적 압박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재단은 제작사에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사자(死者) 명예훼손을 거론했고, 한 전직 시의원은 감독과 제작진을 형사 고발했다. 제작사는 중국 자본 유입설까지 불거지자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해야 했다.
화살은 영화를 소개한 개인에게도 향했다. 영화를 다룬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에게 비난 댓글이 몰리면서 영상을 내리거나 사과 방송을 하는 경우가 나왔다. 온라인 평점 사이트에는 영화를 보았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점수 테러가 이어졌고, 일부 학교의 단체 관람 계획은 교육적 적절성 논란으로 번졌다.
반대편의 태도도 도마에 오른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사이, 같은 잣대를 자기 진영의 상징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배후가 있는 것처럼 그린 작품이었다면 같은 태도를 보였겠느냐는 지적이다. 내 편의 성역에는 엄격하고 상대의 성역에는 관대한 이중 잣대가 좌우 양쪽에서 작동한다는 비판이다.
성역이 된 두 이름
이번 사태의 밑바닥에는 한국 정치가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는 문제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박정희는 산업화의 성과와 권위주의의 그늘이 공존하는 인물인데,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성과만 남은 불가침의 상징이 됐다. 노무현은 권위주의 청산의 상징이자 비극적 서거로 도덕적 자산이 된 인물인데,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비판이 금기시되고 정치적 심판의 잣대로 소환된다.
인물이 역사의 영역을 떠나 정체성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논쟁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건의 해석을 묻는 질문이 곧 모욕이 되고, 비판은 곧 적대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입장을 정하고, 입장이 다르면 사람부터 공격하는 풍경은 이 구조의 결과다.
대통령의 언어도 시험대
이런 와중에 대통령의 SNS 메시지가 또 다른 논쟁을 낳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일 엑스(X)에서 지지자가 만든 정부 성과 소개 글을 공유하며 "좌아하게 말입니다"라고 적었다. '우아하게'의 '우(右)'를 '좌(左)'로 바꾼 이 말은 품격 있게 하자는 뜻으로 지지층 사이에서 쓰이는 온라인 유행어다.
취지는 선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좌우 구분을 전제로 한 언어유희를 전 국민이 보는 공간에서 쓴 것이 국민통합의 책무와 어긋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 대통령이 불과 보름여 전 스스로를 모든 국민을 섬기는 '통합의 대통령'이라고 규정한 만큼, 말의 무게를 더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갈등이 격화된 시기일수록 국정 최고책임자의 표현은 갈등을 식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소환 대신 미래 설계로
전문가들, 역사가들이 공통으로 제안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역사적 사건의 평가는 사료와 학계, 사법의 몫으로 돌리고, 정치는 그 위에서 소모적 공방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창작물에는 고발과 상영 중단 요구가 아니라 반론과 비평으로 맞서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반대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쪽도 유족의 아픔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여야가 힘을 쏟아야 할 곳은 과거 인물의 소환이 아니라 저출생과 일자리, 안보, 양극화처럼 다음 세대가 짊어질 과제다. 대통령 역시 지지층의 언어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지지층과의 유대는 정책 성과로 증명하면 되고, 통합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시민의 몫도 있다. 박정희의 성과와 과오를, 노무현의 정신과 한계를 함께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작품은 작품으로 보고, 비판은 비판으로 끝낼 때 사회는 갈등의 비용을 줄이고 미래에 쓸 에너지를 얻는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남긴 가장 큰 숙제는 두 사람을 놓고 싸우는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이 풀지 못한 문제를 풀어내는 일이다. 영화 한 편이 던진 논란을 소모적 대결로 끝낼 것인지, 성찰의 계기로 삼을 것인지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 방향이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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